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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던“영화놀이”/최국철
 > 2010-2-4 12:12:00 조회 :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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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출신이거나 시골출신을 막론하고 우리 세대의 공통적인 추억속에는 광적으로 흥분했던 영화관람기들이 만국의 기발처럼  저마다 한자락씩 펄럭이고있는데 그것이 아주 후진 풍경이면서도 찬란한 놀이라고 분류할수 있는, 여유가 생긴 요즘에는 민속적인 문화놀이 측면에서도 엿볼수 있을것 같다. 민속놀이속에 경기,   오락,  연희따위 놀이가 배속되여있다면 영화감상도 문화적인 놀이에 배속할수 있을것이다. 황차 그것이 지난 세기 특정년대 특수장소에서 치밀한 예술성이 가미되지 않고 이데올로기적인 색채가 다분한 영화감상이란 꼬리표가 붙는 특정현상으로 표현되였다면 영화는 감상이 아니라 찬란한 민속문화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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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체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재현코저 하는 인간의 꿈은 인간문명이 욱복(郁馥)하면서부터 시작되였다.  정지된 화상을 련속적으로 돌려 인간의 잔상(残像) 현상을 리용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영화가 발명되기까지는 무척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되였다. 영화의 발명에 결정적영향을 끼친것이 사진술의 발명이였다면 1895년에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이 사진술에 근거해서 영화를 발명했고 그 뒤로 무성, 발성,색채영화가 나타났다. 과학문명의 발달이 가져다준 필연적인 산물이였다.
이 기계문명이  “이동영사대”란 이상한 이름을 갖고 연변시골의 밤하늘을 활동사진으로 어지럽힐무렵은 지난 세기 50년말부터라면 비슷할것 같다.  지금 보면 16밀리메터 영화였지만 그 당시 유일하게 외계의 세상과 접촉할수 있는 기기였다.이동영사대는 공사혁명위원회(지금의 진 당위,  정부)에서 조직한것인데 일반적으로 2명의 방영원이 각 대대(촌)를 순회하면서 상영했다.
영화가 상영되는 저녁이면  산촌의 밤은 초저녁부터 명절분위기다. 집집마다 사카린을 듬뿍 쳐서 무척 달기만 하는  닦은 콩이거나 옥수수를 와드득 와드득 씹으면서 “써료” 혹은 “쏘료”라고 불렀던 비닐박막까지 준비하고 영사막앞에 자리를 차지하는 전쟁을 벌렸다. 영화를 일반적으로  “본편”이라고 불렀고 그 “본편”을 상영하기전에 국책영화 논픽션영화(기록,뉴스영화)를 돌렸는데  보통 과학기술편, 과학영농편 같은 기록편을 상영했는데 “본편”이라는 영화를 기다리는 우리들에게는 그 뉴스가 가볍고 너무 시시한것으로 되여 그후 진짜가 아닌 가짜, 리허설 같은 모든 활동들을 “기록편”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그외에도 환등도 돌렸는데 슬라이드 영사기에 그림이 박힌 사진필림에 빛을 투과시키고 멈춰있는 영상을 비추는 장치다. 장방형필림을 꺼냈다 빼내는 소리가 텅텅 울리는 환등속에는 문화대혁명의 이지러진 잔상들이 춤추군 했다.
  영화에서 남녀간의 제일 친밀한 장면은  “10월 레닌” 에서 와씰리부인이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장면이였는데 그 정경을  숨소리가 날세라 가만히 지켜보는 시골사람들의 그 신비의 체험이 끝날쯤에 45전짜리 눅거리 크림을 바르고 한켠에 오리처럼 오구구 몰려서서 구경하던 시골처녀들의 키드득거리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후후… 킬킬 소리가 나던 그 풍경은 지금도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그 당시에는 밤마다 왜 그렇게 비가 줄창 쏟아져내렸는지 지금 보면 거짓말 같다. 영화구경을 하다가 비가 쏟아지면 언녕 비닐박막을 준비하고 온 부모님들이 저마다 자식들을 부르면서 비닐박막을 넘겨주는데 장내는 복새통이 터지면서 아주 소란스러워서 영화를 중단하는 사태까지 빚는다. 그 시기에 우리들은 “지뢰전” ,“갱도전”,“삼감령”,“침략자 타격”, 외국영화로는 알바니아의 “매복습격전”,“죽어도 굴하지 않는다”, 조선영화 “보이지 않는 전선”,  “사과딸 때”, 로씨야영화(구쏘련) “1918년 레닌”  등등 수많은 영화를 수십번이나 구경했다. 그리고 등옥화가 부른 “갱도전” 삽곡 “모주석의 말씀을 아로새기며”와 곽란영이 부른 “삼감령”의  삽곡 “나의 조국”, “영웅아들딸”중에서 주인공 왕성이 가슴을 치면서 “승리를 위하여 나한테 포를 쏘라”는 영화장면을  제현상(諸現象)을 구명하듯 아주 자랑차게 외우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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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것이 영화를 감상한후의 며칠간의 관전 포인트라면 이동영사대를 따라서 밤마다 인민공사의 각 대대(촌)를 순회하면서 구경하던 그 풍경이 영화놀이라고 불리울수 있는 포인트가 되는것이다. 이 영화놀이는 활동 자체가 즐거움과 만족을 주었고 우리들 세계에 그 어떤 목적이거나 강제성과는 유리되는 무리들의 새로운 기능을 주고 사회의 습관을 익히게 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는것이다.
그 당시 연변의 모든 시골마을에서 이런 영사대를 따라다니는 일은 흔히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했는데 이 놀이에는 칠흑같은 밤길을 대비해서 손전등을 준비하는데 보통 “3 방짜리” 혹은 자체로 이은 “5방짜리”전등이 동원되는데 여기에서 “5방”이란 건전지 5개를 넣는다고 이렇게 불렀다.이렇게 밤마다 이동영사대를 따라다니면서 각 촌을 돌면서 “갱도전”,“지뢰전”을 구경했는데 10리 걸음은 보통이였다. 시골어린이들이 이렇게 영화놀이를 했다면 도시의 어린이들은 매표구에서 10전짜리 영화표로 하여 눈물을 흘렸고 보이라실,  변소간으로 가만히 흘러들어갔던 력사도 있다.
이 이동영사대가  소실될무렵은 80년대라고 봐야 하는데 영화관으로 옮기면서 좋은 영화가 있다 하면 시골에서 공사영화관으로 구름같이 밀려갔다.
와이드스크린(宽银幕 ) 영화라고도 했는데 엄격한 의미로는 35밀리메터 규격 이상의 필림을 영사할수 있는 영사막(스크린)을 가리키는것이다. 그 당시 세계적으로 언녕부터 시네라마, 시네마스코프, 70 영화, 서클비전360도 등의 다양한 선진 영화종류가 있었지만 우리들은 까맣게 몰랐고 1940년대를 정점으로 호황을 누렸던 영화가 차차 텔레비죤에 밀리게 되자 대형영화가 등장된것을 몰랐다. 더우기 새 천년에 들어서면서 립체영화라고 하는 “3D”영화까지 출시될줄은 상상못했다.
이 대형스크린 영화를 구경하기 위하여 각 대대(촌)에서는 손잡이뜨락또르를 동원하고 그 작은 적재함에 20여명씩 처녀총각을 박아싣고 내리막길에서 수동변속기어를 풀고 아주 질풍노도같이 내달리는 모험도 많이 했다.  그리고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담배조리실 창문을 막고 코구멍이 새까맣게 되여서 대낮에 영화놀이를 한 일들은 또 어쩌고…
이것이 우리들의 소년기와 청년기의 영화놀이 한자락 풍경인데 지금 다시 돌아보면 잔등 한구석에 서늘한 바람이 후르르 불면서 지나친다.

연변일보 2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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