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은 장백산 주봉의 동쪽기슭에서 발원하여 화룡,룡정,도문과 훈춘시 경내를 거쳐 일본해로 들어간다. 중조 두 나라 류역의 길이가 510킬로메터여서 “천리두만강”이라고 부른다.
통상구는 나라의 대문으로서 대외래왕의 통로이다.연변경내에 지금 있는 통상구는 훈춘 중-로통상구와 연길공항통상구를 제외하고 8개 통상구가 모두 두만강에 설치되여있고 국경다리로 련결되였다.
100년전인 1909년 12월 27일,청나라 총세무사는 헬렌트를 관장대리로 임명하여 산하 17명 수행인원과 함께 마차를 타고 눈보라를 헤치면서 훈춘에 가 세관을 설치하였다.그 이름을 “훈춘통관”이라고 불렀는바 이것이 길림성 제1관이였다.그후 두만강에 크고 작은 나루터통상구를 선후로 설치하였는바 통상구 백년 력사는 이때로부터 시작되였다.
통상구를 옛날에는 관문(关卡),분소(分站),감시소,검사소라고도 불렀다.력사기록에 의하면 1930년전까지 나라에서 두만강에 설치한 통상구는 40여곳이나 되였다.두만강상류에는 홍기하,로과,삼합,불여우곬, 신전, 하전동, 학전동, 하남호, 류동, 대동구, 개산툰, 종성선구였고 도문시경내에는 백룡평,북흥가, 대우동, 학포, 석건평, 간평, 마패,하전자,량수천자,공동산,서강구였으며 두만강하류에는 밀강, 세완자, 사토자, 하구, 대두천, 양초구, 경신, 이도포자, 회룡봉, 구사평 등이였다.
20세기 30년대 장-도,목-도철도가 개통되였고 두만강철도,도로대교가 준공되여 직접 조선철도에 이어져 도문이 일약 중조,중일 교통요지로 되고 통상구무역액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1939년 도문통상구 무역액은 2.4억일원(日元)을 돌파하여 대련항구 다음 동북 제2의 통상구로 부상하였다.도문과 조선 남양간에 통하는 렬차는 매일 26차에 달하였는데 그중 려객렬차가 16차에 달하고 려객은 월평균 연인수로 10만명에 달하였다.국경도로다리를 건너는 인수는 제일 많은 날에는 2만명에 달하였다.
1945년 8월,도문이 해방되자 통상구의 관리권은 일제의 수중으로부터 인민정부에 넘어왔다.연변전원공서에서는 두만강의 28곳에 통상관세소를 설치하여 연변해방과 건설 및 국내해방전쟁지원에 매우 큰 기여를 하였다.1952년 중앙정무원의 지령에 따라 대부분 통상구는 페쇄되였다.두만강에 도문철도통상구,도문,개산툰,삼합도로통상구와 남평통상나루터만 남았다.80년대에 대외개방을 실시하면서 해외교류의 수요에 따라 사토자, 고성리, 권하 통상구를 선후로 복구하였다.
통상구는 대외개방의 문호이고 변경경제를 발전시키는 “주력군”이기도 하다.주은래,주덕,호요방,강택민,리붕 등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선후로 도문통상구를 시찰하여 통상구사업을 지도하였다. 각급 정부에서는 통상구의 건설을 관심하였는바 거액의 자금을 내여 국문,통상구검사청,국경다리를 륙속 건설하여 대외래왕에 편리를 주었다.
건국 60년간 두만강통상구를 거쳐 출입국한 각종 화물은 루계로 1억톤, 각종 차량 300만대, 국제소포와 인쇄품 800만건, 출입국인원 400여만명에 달하였는바 연변의 경제진흥과 나라의 사회주의현대화건설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김태언 편역)
[연변일보 2010-1-26 14:1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