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일
들어가는 말주선우 (朱善禹, 1924-198?) 선생은 1957년 초반에 조선족시단에서 맹활약하다가 불행하게 세상을 뜬 시인이다.
필자는 학창시절에 《연변문예》,《아리랑》를 통해 그의 이름을 알고 그의 작품을 읽어보았을 뿐 한번도 그를 만나본적이 없다. 실로 생면부지(生面不知)다.
나중에 “반우파투쟁”때 문학지에 실린 그에 대한 비판문장과 그의 전우 최정연선생이 1997년 7월에 쓴 “분노에 타는 편지”(그의 작품집《울고웃는 인생길》에 수록) 를 통해 그의 불행한 인생살이를 알게 되였고 큰 충격을 받았다. 시인의 운명은 기구하였다. 필자는 죽음의 세계로 가버린 망자를 불러 그의 혼을 달래주며 떠도는 원귀(寃鬼)도 잠재우고 싶어 또한 그의 신세를 후세에 알리고 싶어 현존하는 그에 대한 자료는 얼마 없지만 흩어져있는 파편자료들을 힘겹게 모아 추모의 마음으로 이 글을 엮는다.
주선우, 그는 누구인가?주선우선생은 1924년 조선 평양 사암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전우 최정연선생은 그의 인적사항에 대해서 수필 “분노에 타는 편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있다.
“주선우씨는 1945년 8월 일본 천황이 무조선 항복하기 9개월전에 군대에 끌려나갔다가 돌아와 통화에서 조선의용군 1지대(동북민주련군 1지대)에 참군하여 선전대 편집조에 배속되였다.
그는 사람이 솔직하고 남의 어려움을 잘 돌봐주는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지고있어서 편집조의 친구들은 그를 조장으로 천거하였고 조직에서도 인차 비준이 내렸다.
그는 열렬한 문학청년이였고 시쓰기를 즐겼다.
우리는 3년 동북해방전쟁동안에 전투부대를 따라 행동하면서 주선우조장의 인솔하에 많은 ‘긴급임무’, ‘특수임무’, ‘돌격임무’를 완성하기 위해 행군하면서도 작품을 구상했고 휴식시간에도 절목련습을 했었고 불철주야 적과 마주선 기분이였다.
주선우씨는 생활에서나 사업에서나 고생은 자기가 안고 명예는 남에게 돌렸다. 그는 종래로 자기는 ‘후근부장’이 주요임무라고 하면서 시종일관 작품토론에 같이 참가했고 그 작품이 공연되여 대환영을 받았을 때에도 그 작품의 창작성원속에 자기의 이름을 써넣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동북해방전쟁이 결속될무렵 사단정치부에서는 그에게 대공1차를 기입해주었고 가슴에다 큼직한 붉은 꽃송이를 달아주었다.
항미원조전선에 나갔을때는 모 군단 정치부 선동원으로 임직, (군공메달, 국기훈장 등을 수여받음.) 최전선에서 부대문예활동을 전개하던중 불행하게도 척추에 부상을 입고 1952년 가을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문교처에 전업하였고 연변작가협회가 성립되자 창작위원회 주임직을 맡았다.”
주선우선생은 행정사업에 투신함과 더불어 분망한 틈을 타서 시창작에 열을 올렸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1957년에 “우파”로 몰려 투쟁을 받았고 1960년에 조선에 망명하여 불행한 삶을 힘겹게 지탱하다가 세상을 떴다.
시창작에 몸부림치던 사나이주선우선생은 1952년에 조선족문학발전을 위해 자기의 전우 최정연선생과 더불어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인 연길에 온후 시창작에 혼신을 불태우면서 몸부림쳤다.
그는 《동북조선인민보》,《연변문예》,《해란강》,《연변일보》, 《아리랑》 등 시문, 문학지,종합지들을 통해 자기의 시작품 “어머니의 부탁”(1954), “궁전을 지을 때도”(1954), “봄전투”(1954), “무산령”(1954), “대가정의 축배”(1955), “가자!”(1955), “파란 댕기”(1956), “포성을 다시 울리지 말라”(1956), “잊을수 없는 녀인”(1957), “첫사랑”(1957), “민화시 2수”(1957), “이 세상 광명앞에서 부른 노래”(1957) 등을 지속적으로 줄기차게 발표하였다.
이처럼 시창작이 무르익어갈 무렵에 그는 1957년 4월 자기의 첫 시집이요 건국후 조선족시단의 첫 서정시집인 《잊을수 없는 녀인들》(연변교육출판사 출판))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시집의 주요한 주제풍향을 잡아보면 사랑, 전쟁과 평화이다. 그중 사랑을 다룬 서정시《잊을수 없는 녀인》(《아리랑》 1957년 2월호)의 후반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도 들려 옵니다
령혼을 위안하던 당신의 음성이
어둔 밤에 밝은 봄볓을 가져오던
당신의 음성을 듣습니다
“안해가 있나요”
…………………
“그러나 외로워 마세요”
내 얼굴에
당신의 볼을 대였습니다
인제는 신념을 주어야 할 시간도 지난줄
당신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을 때
내 가슴의 풍랑은 잔잔해 지고
찬란한 물결이 눈시울에 금실거렸으니
어머니의 품에 잠드는듯
안해의 애무에 감격된듯
나의 생명은 평온속에 잠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나는 모릅니다
얼마나 당신이 수고하셨는지
나한테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 지금 알고있는 것은
안해의 품에 안긴듯
아무 불안도 없었다는것입니다
나의 친근한 부부들이여!
누가 먼저 죽게 될까 하고
롱담속에서도 말하지 말라!
세상에 가장 큰 슬픔은
고독한 자의 림종이여라
나의 친근한 벗들이여!
홀 어버이를 뜨겁게 모시라!
그는 장수해야 하나니
사랑하는 처녀들아! 총각들아!
어서 빨리 사랑을 구하여라!
수 천년을 두고 인간을 울려 왔고
모-든 종교가 다 해결치 못한 고뇌를
그대들의 사랑은 다 해결하여 주리라
나의 노래는 죽엄의 찬미가가 아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기쁨을 말하나니
이 진리를 아르켜 준 이
잊을수 없는 녀인이여
이 시를 그대 앞에 쓰노라!
이 서정시는 화자가 전쟁이 끝난후 지난날 전쟁에서 중상을 입고 병상에 누워있을 때 “한 손에 촛불을 들고/깊은 수심에 잠겨/나를 지켜 새우시던” “잊을수 없는 녀인”을 사믓차게 그리워함과 더불어 그때의 절절한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에네지, 사랑이 죽음을 이긴다는 철리를 다정다감하게 그리고 비장하게 읊조리고 있는것이다. 당시 좌적인 사조의 억압하에 대부분 시인들이 사랑의 주제를 다루기를 두려워하고 시의 경직된 “주제정치화”, 렴가적인 “송가풍”에 목을 매고있을 때 주선우선생은 시인의 량심에 기대어 이런 정치적사조와 문학경향에 반기를 들고 사랑의 찬가, 생명찬가, 평화의 찬가를 창출하였으며 인간의 내우주(內宇宙)를 대담하고도 진솔하게 표출하였다.. 당시의 정치적풍토속에서 이런 시를 발표하였다는 것은 아무나 할수 없는 일로서 력사는 이에 대한 공로를 참답게 평가해 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필자는 지난 세기 80년대 말에 중국조선족문학사를 쓸 때 주선우시문학을 다루지 못했으니 참회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우파”로 되여 비판의 “단두대”에 오르다주선우선생의 시창작이 바야흐로 상승세를타고 있을 무렵에 무정한 “반우파투쟁”은 주선우선생을 ‘우파”로 지목하고 그를 비판의 “단두대”에 오르게 하였다.
극작가 최정연선생은 “분노에 타는 편지에서 “반우파투쟁”시기의 주선우선생을 두고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제가 죽는줄 모르는 것이 사람인가싶다. 솔직하고 충성하고 당의 사업에 일체를 바친것으로 대공까지 받은 주선우씨가 그 솔직한 내심을 고백한 것으로 하여 인사출동(引蛇出洞)낚시에 걸릴줄이야! ‘중국이 나의 조국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감정상에서는 자꾸 조선이 제 고국같습니다…’ 이 말은 나중에 죄가 되여 우파모자를 쓰”게 되였다.
주선우선생이 “우파”로 몰리게 된 터무니없는 “리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이른바 “우리의 현실을 외곡하고 우리 혁명사업을 진공한 독초이며 포탄”인 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들》을 출판했기때문이라는것이다.
이 시집에 비판의 예봉을 돌린 대표적인 글은 1958년 2월호 《아리랑》에 실린 철봉의 글 “주선우의 립장과 붓끝-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들》에 대하여”이다. 이 글중의 몇대목을 발취하면 다음과 같다.
“《잊을수 없는 녀인들》에는 독기어린 시편이 수록되여 있는데 그 가운데 소위 처녀와 녀인을 ‘구가’한 시편이 15편이며 기타는 죽음과 공포, 반동적무사상성을 고취하였거나 량면파적수법으로 연막을 친 시편들이다”.
“우파분자 주선우는 우리의 처녀와 녀인들의 고상한 도덕적풍모, 진지한 사랑, 건전한 정서와는 추호도 공통성이 없는 병적인 소위 사랑, 육감적이며 동물적인 소위 말초신경이나 자극하기에 적당할 사랑 아닌 사랑을 극구 찬양하는것으로써 우리의 처녀와 녀인 그리고 청년들의 씩씩하고도 참다운 형상을 더럽히고 우리의 우렁찬 시대의 목소리를 가냘프게 하였으며 나아가 사회주의적현실을 외곡하여 반영하였다”.
“이 시편들에서는 구역질이 나는 자산계급의 ‘저급적취미’에 담뿍 젖은 련애지상주의자 주선우의 색마적면모와 그의 반동적기도를 낱낱이 보아낼수 있다…그의 시의 서정적주인공들은 자기의 동물적본능과 야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광분하며 자기의 일체를 다 바친다. 즉 그 서정적주인공은 녀인의 품안을 위하여 자기를 바치며 살고 또한 울며 웃는다”.
“ ‘잊을수 없는 녀인’은 이 시집가운데서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역시 사랑을 만능의 힘으로 례찬하면서 ‘슬픔’과 ‘고뇌’를 ‘그들의 사랑은 해결하여 주리라’고 소리 높이 웨치고있다. 그리하여 ‘사랑’만이 가장 아름답고 ‘사랑’만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을 나아준다는 련애지상주의와 죽음에 직면한 위대한 국제주의전사에게 ‘사랑’과 ‘안해’만이 생의 신념으로 된다고 사실을 날조하여 강조하고있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고독’의 눈물과 비애에 잠기게 하며 그 어떤 허무한 ‘신념-신앙’을 극도로 강조하여 전선을 버리고 극단 개인적안일을 추구케 하려 시도하였다”.
“소위 그의 ‘시 전체에 흐르고있는 기본 감정…구체적소재들이 가지고있는 구체적감정은 건전하지 못할뿐더러 숙명적이며 종교적이고 퇴페적이며 색정적이고 극단 개인주의적이다.”
“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들》은 우리 시대의 억센 목소리가 아니라 그의 우파적립장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의 현실을 외곡하고 우리 혁명사업을 진공한 독초이며 포탄이다”.
주선우선생은 이런 무단적인 비판의 흑풍에 휘말려 “18층 지옥”에로 떠내려갔으며 원한을 안고 여생을 힘겹게 지탱해야 했다.
동식서숙(東食西宿)하다가 세상 뜬 원혼“우파”로 된 주선우선생은 정치권리와 창작권리를 박탈당했으며 지난날의 혁명전사가 하루 아침에 “계급의 적”으로 추락되여 “집중개조대”에 가서 억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집중개조대”에서 “개조”를 받은 이른바 적지 않은 “우파”들은 나중에 ‘우파모자”를 벗고 농촌, 공장, 기관 등에 배치되여 갔으나 유독 주선생과 같은 이른바 “화강암대가리”만은 그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 작품에 대한 비판에 불복하였으며 어느 ‘개조촉진대회”때 또 솔직하게 조국문제에 관한 원래의 그 말을 반복하면서 “나는 아직도 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습니다…”라고했으니 “완고불화(頑固不化)”한 “화강암대가리”로 지목되여 “우파모자”가 벗겨질리 만무하였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그는 거듭되는 고민과 사상투쟁끝에 삼십륙계에서 달을 주(走)자를 놓았다. 1960년 하반년 어느날 그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모국이라고 찾아간 조선에서도 그의 운명은 불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선당국의 이런저런 “의심”을 받아 당치 않은 루명을 쓰고 불행하게도 “독재”를 당해야 했다고 한다. 1886년 연길에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던 시절에 연변인민출판사 문예부부장으로 임직하고 있었던 허해룡선생네 집에 3일 묵으면서 주선우선생은 허해룡선생에게 자기가 조선에 망명한 뒤의 비참한 운명을 털어놓은 적있다. 조선에 간지 10여년이 지난 뒤 주선우선생은 또 형님이 미국에서 산다는 원인으로 조선 함경북도의 한 ‘특별독재대상구역”에 갇히게 되였다고 한다. 그 안에서 고생하던 이야기는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비극이였다. 10킬로그람도 안 되는 한달 식량을 배고프다고 며칠 사이에 다 먹어버리면 굶어죽게 되므로 10킬로그람 미만의 식량을 30등분으로 나누어놓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 등분만 먹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을 닥치는대로 먹었다고 한다. 산나물, 들나물을 보면 캐여먹고 개구리가 보이면 개구를 잡아먹고, 배암이 보이면 뱀을 잡아먹고 쥐가 보이면 쥐를 잡아 먹고 지렁이가 보이면 지렁이를 잡아 먹으면서 7년 동안이나 비인간적인 삶을 살다가 그래도 죽지 않고 구사일생으로 ‘특별독재대상구역”에서 살아서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주선우씨는 출옥 후에는 중병에 걸려 병마와 사투를 벌려야 했다. 병마는 그에게서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그는 중국 연변에 가면 자기 병을 치료할수 있고 좀 더 살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그는 연변을 떠난 26년만에 할빈에 있는 누님을 찾아뵙고는(누님의 가정형편으로는 그의 병을 치료할수 없는 상황이여서) 조카딸의 부축하에 연길에 있는 연변작가협회로 왔다.
당시 연변작가협회 리근전주석이 주선우선생을 영접하였다. 리근전주석은 그의 병이 중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속히 입원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히였다. 하지만 그가 조선공민이기 때문에 입원수속이 까다로와서 즉시 입원시킬수 없었다. 리근전은 극작가 최정연선생을 찾아 입원수속을 하는 며칠동안 주선우선생을 좀 맡아달라고하였다. 최선생은 주선우선생이 “7년 화선전우였고 후방에 돌아와서는 한 단위에서 일했고 57년에 우파모자도 같이 썼고 철창없는 옥살이도 같이 한 지기지우인”(최정연)탓으로 그를 자기집에 데려다가 돌보기로 쾌히 승낙하였다. 최정연선생은 수필 “분노에 타는 편지”에서 주선우선생을 돌보던 상황을 자세하게 서술했는데 그중 몇 대목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우리 집에서는 제일 큰 온돌방이지만 한족식 구들이여서 사람이 거처할 면적은 넓지 못했다. 우리 량주가 손자애를 데리고 자는 방인데 끼니때마다 일곱식구가 둘러앉아 밥을 먹는 식당이요 낮에는 애들 운동장까지 되다나니 언제나 부산했으므로 환자가 조용히 누워 안정할 수가 없는 형편이였다.
시작부터 나의 심리부담은 무거웠다. 주선우씨는 우리 식구들과는 생면부지여서 내가 언제나 옆에 붙어있어야 했다.
나는 그가 사람이 선량하고 입이 무겁고 인내심이 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있기에 어디가 어떻게 아픈가? 먹고싶은 음식은 뭔가?하고 자주 물어봤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없다고만 대답을 했었다.
전선에서 척추부상을 입고 수술치료를 받을 때도 아프다는 말 한다미 안한 사람이 후방에 돌아와서도 부상을 당했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고 맡은 과업이 그렇게 분망하면서도 시인다운 시각으로 생활을 대했고 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들》과 같은 감격적인 시를 엮어 세상에 내놓았었다. 그의 시는 감정이 풍부하고 심각해서 나는 매우 좋아했다.
나와 가족들이 참고 견뎌내기 어려운 일들이 속출했다. 온 식구가 한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데 주선우씨는 둬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밥 한공기를 먹어내는데 그것도 이쪽으로 한술 떠넣으면 저쪽 입귀로 밥알이 비죽비죽 흘러나왔다. 그래도 그것을 감각못했고 량손가락을 갈구리처럼 해들고는 머리칼을 움켜쥐고 수없이 긁어댔다. 머리비듬이 국그릇에 뿌옇게 떨어지는데도 역시 무감각이였다. 딴 식구들 보기에도 안됐고 해서 내가 암시를 주느라고 툭 다치며 손수건으로 입귀에 밀려나오는 밥알을 닦아주면 ‘기차 죽겠소’하고 허구프게 웃으며 숟가락을 조용히 놓는다. 그때 심정이야말로 불쌍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정연동무, 내가 왜 이렇게 되였는지 나도 모르겠소…’
그는 이런 말을 몇번이나 반복을 했다.”
며칠이 지나 주선우선생은 연길시중의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연변작가협회에서는 기술설비가 비교적 좋은 연변병원에 입원시키려고 거듭 교섭을 하고 애도 썼지만 외국공민에 대한 “입원불허”규정 때문에 무산되였다. 중의원에 입원하게 된 것은 “안면교섭”을 통한 “빼기”의 덕을 보았기때문이였다. 당시 연변작가협회의 재력상황이 몹시 어려웠기 때문에 주선우선생은 한달동안의 주원치료를 받았으나 병세의 호전을 보지 못한채 부득불 퇴원해야 했다.
퇴원후 자기의 병이 큰 호전을 보지 못한것을 잘 알고있는 주선우선생은 여러모로 생각을 굴리던끝에 작가협회 지도부에 길림종업원료양원에 보내달라고 탄원하였다. 하지만 작가협회 책임자는 자기들의 힘으로는 주선생의 탄원을 현실화시킴에 있어 역부족이였기 때문에 긍정적인 답을 줄수가 없었다. 주선우선생은 급기야 연길을 떠나려고 작심하였다. 따라서 그는 연길에서 더 치료했으면했던 마음을 접어버린 끝에 홀연히 지팽이를 짚고 쓸쓸하게 연길을 떠났다. 떠날때는 할빈 누님집에 간다고하고서는 할빈으로 간것이 아니라 길림시로 갔다.
누구를 믿고 길림시로 갔을까? 주선생은 길림시문화관에 있는 시인 문창남씨를 믿고 찾아갔다. 주선생은 “창남군이야말로 대담하고 주동적이고 민족애가 끓어넘치고 제살처럼 귀중히 아끼고 애쓰고 떼주고 천방백계로 고통을 알아주고 풀어주고 제 힘이 모자라면 남의 힘을 빌어쓰”는 사람임을 일찍부터 알고있었다. 그의 길림행은 헛되지 않았다.그는 문창남씨에게 자기의 소원을 말했다. 문창남씨는 아무런 조건부도 없이 추호의 주저심도 없이 그의 소원대로 길림종업원료양원에 입원시켜주었고 치료를 받으면서 료양하게 하였다. 이는 아무나 할수 없는 미거(美擧)였다. 문창남씨의 인간됨을 여기에서도 절감할수 있는것이다.
그후 주선우선생은 어디로 갔는지 알수 없다. 그리고 어느 고장에서 한많은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갔는지 모른다. 단지 최정연선생의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기록만이 있을뿐이다.
“그후 얼마 안지나 나는 또 주선우씨의 미망인 리정실녀사한테서 주선우씨가 타계를 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그 부고속에는 남편의 유촉이라며 문창남선생의 은공 백골난망이니 자기를 대신해서 심심한 감사를 올려달라고 적혀있었다 (최정연 “분노에 타는 편지’에서). 최정연선생의 글을 보면 주선우선생이 다시 연변땅을 밟은 시간이 1986년이라 할때 1986년 말 아니면 1987년 초에 사망되였을 것이라고 짐작되지만 구체적인 사망 시간을 확인할수가 없다.
최정연선생과 문창남씨가 타계하지 않았다면 주선우선생의 길림을 떠난 후의 행방과 억울한 죽음에 대한 정보를 자상하게 알수 있으련만 그럴 사정이 못되니 가슴 아프다. 아마도 중국이나 조선의 어디에선가 무주고혼(無主孤魂)으로 지금도 정처없이 떠돌면서 자기 일생의 비운과 원한을 하소연하고 있을 것이다.
조선족문학사에 주선우선생의 시문학에 대해 다루어주지 못한 필자는 주선우선생에게 미안함이 그지없다. 그는 우리 조선족문학발전을 위해 기여하였건만 생전에 문단의 긍정적조명 한번도 받지 못하고 잔혹한 비판만을 받고 무섭고도 불행한 비극적종말을 맞게 되였다.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나오는 말문인으로서 우리 문단의 숨겨진 슬픈 력사를 외면하거나 망각하는 것은 “문인유기(文人遺棄)”라고 생각한다.
극좌로선과 세력에 의해 부당하고 잔혹한 비판을 받고 왜곡되여진 기억들을 바로잡아야 일, 인정받지 못하고 죄인의 루명을 쓴채 버려진 죽음들, 그리고 그네들의 억울한 죽음들과 그네들의 깊은 심적인 상처들을 망각과 무명의 어둠속에서 불러내여 진혼(鎭魂)하는 일을 우리가 감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2009.5